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다섯 번 째 구절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기에 더욱 간절한 말씀이다.
정용기(鄭鏞基) ⑤ <山南倡義誌 卷下 21~23p>
드디어 부서를 정하기를, 여러 대중의 추대로 공(公)이 대장이 되고 중군장(中軍將) 이한구, 참모장(參謀將) 손영각, 소모장(召募將) 정순기, 도총장(都摠將) 박태종, 선봉장(先鋒將) 홍구섭, 후봉장(後鋒將) 이세기, 좌영장(左營將) 권규섭, 우영장(右營將) 이규필, 연습장(練習將) 우재룡, 도포장(都炮將) 백남신, 좌익장(左翼將) 정래의, 우익장(右翼將) 김성일, 좌포장(左炮將) 장대익, 우포장(右炮將) 김일언, 장영서장(將營書掌) 김진영, 군문집사(軍門執事)에 이두규를 세우고 각 초장(哨長)을 정하였다.
군중에 명을 내려 군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참(斬)할 것이라 하니 군기가 엄숙하였다. 각지로 전령을 보내어 이르기를 “갑오(甲午:1894년) 이후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하게 살인하거나 부녀자를 겁간하거나 재물을 탈취하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본진(本陣)에 고발하라.” 했다. 또 청조문(請助文)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드디어 행군(行軍)을 시작하니 때는 정미(丁未:1907년) 7월 12일이었다. 관동으로 들어간다고 약속한 지 이미 2개월이나 지났다.
병마가 몸에 침입하여 대사(大事)의 때를 놓치니 천리 행군의 군막에서 근심걱정과 우울함은 말로 할 수도 없고 후회도 막급(莫及)이라, 참모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적이 부산으로부터 해안으로 쫓아와서 낮에는 바다에 정박하고 낮에는 육지로 올라와 주요한 자리를 침략하니 그 까닭에 신태호도 여러 차례 해안에서 패했다. 포항, 흥해, 청하 등의 읍성을 빼앗지 않으면 태호의 부대가 곤란해질 것이요. 태호가 떨쳐일어나지 못하면 관동으로 가는 길을 열 사람이 없다.” 하고 먼저 척후를 해안 등지로 파견했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죽장으로부터 천령(泉嶺)을 넘고, 한 부대는 신녕으로부터 여령(麗嶺)을 넘어 밤에 청하를 습격하니 적이 패하여 바다로 도주했다. 병장기 등속(等屬)을 거두어 천령에 도착하여 조선의 고제철탄(古製鐵彈)들을 천령에 비밀히 감추었다.
척후병이 와서 많은 일본군이 대구로부터 포항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출병 초기에 큰 부대와의 접전은 불가하다고 판단하여 부대를 옮기고자 의논하니 소모장 정순기가 말하기를 “이곳에서 영해로 가는 것은 멀지 않으니 영해로 가서 관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다.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는 초창기라, 머릿수는 천 명이라 하나 무기는 태반이 갖추지 못했으니 빈손의 군대를 거느리고 다른 도의 타향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근 읍으로 돌아가 무기를 일천 이상 모은 뒤에 북쪽의 신태호군과 합하여 관동으로 나아감이 옳다.” 하고 회군하였다.
청송읍을 점령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장맛비가 연일 계속되는데다 기밀이 누설되어 청송을 포기하고 신녕을 향해 진군하다가 자천(慈川)에 이르니 8월3일이었다. 척후병이 영천읍으로부터 급히 달려와서 적병 수백 명이 뒤를 쫓고 있다고 보고한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정각(正角)1)에서 잠복하고 한 부대는 노구령(老嫗嶺)에서 잠복하여 밤이 지나도록 기다렸으나 적이 오지 않았다. 이에 잠복을 풀고 다시 부대를 합하였는데 이날 밤에 5초장(哨長) 김복성(金福成)이 도망가고 적은 안동으로 향해 갔다.
적을 쫓아 안동 둔전(屯田)2)까지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철령(鐵嶺)3)에 진영을 세우고 사방의 소식을 탐색했다. 적이 청송읍으로 들어갔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방대곡(方臺谷)에 복병하여 밤을 지새우며 기다렸으나 적이 오지 않아 복병을 풀었다.
벌전(閥田)에 이르러 김복성을 사로잡아 노략질하고 진에 돌아오지 않은 죄를 물어 참(斬)했다. 의성 녹평(鹿坪)을 거쳐 의흥읍으로 향하려 하다가 군사기밀이 누설되어 회군하여 신촌(新村)을 거쳐 안덕(安德)에 이르렀다.
중도에 청송 관아의 노복 3인을 만나 읍내의 허실을 듣고서 청송을 점령할 것을 의논하고 해질 무렵 신성(薪城)에 이르러 신태호에게 사람을 보냈다. 앞뒤로 적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세 부대로 나뉘어 삼로에서 적을 기다렸는데 14일 날이 밝기 전에 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파수(把守)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하였다.
오랜 교전 끝에 승부가 불분명한 차에 날이 밝음에 적이 추강(秋江) 뒷산으로 도주해가거늘 뒤를 쫓아서 물을 끼고 공격하니 산위에 숨은 채 감히 항전하지를 못했다. 퇴로를 차단하고 기다리던 중 비바람이 몰아쳐 포를 쏠 수 없는 지경이라 포위를 풀었다.
(계속)
각주)
1) 정각(正角) - 현, 영천시 화북면 정각리
2) 둔전(屯田) - 현, 안동시 길안면 송사리의 자연부락
3) 철령(鐵嶺) - 경북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고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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