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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재발견] 영천역사박물관이 다시 찾아온 영천문화유산 조선1798년 ‘환성사 결송 소지 초본’

남애경 본보 논설위원

기사입력 2026-09-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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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지역 역사박물관으로 등록된 영천역사박물관은 영천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다룬 유물과 전시물이 배치되어 있는 전시, 교육 전문 박물관이다. 영천역사박물관 설립자인 지봉 스님은 영천 지역 역사에 초점을 두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현재 4만여 점의 지역 역사 중심의 문화유산을 수집해 연구하고 있다. 
영천역사박물관의 대표 소장유물로 세계 최초 상업용 일간신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민간인쇄조보(521호 등재) 등 지역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영천의 전통과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본보는 영천역사박물관과 함께 위대한 지역문화유산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 조선시대 포은 정몽주 기리는 사액서원의 은해사·거동사·환성사·인각사 가혹한 경제적 징발에 신음
조선시대 성리학의 이념적 상징이자 조선후기 영남 영천유림의 중심지였던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는데 이 거룩한 공간의 이면에는, 인근 사찰 승려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영천역사박물관은 최근 1798년에 작성된 ‘환성사 결송 소지 초본(環城寺 決訟 所志 草本)’을 찾아왔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 영천 환성사(현재 하양) 승려들이 임고서원의 가혹한 잡역 요구와 침탈에 맞서 영천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오랜 법적 분쟁(송사) 끝에 승소한 판결 내용을 담은 핵심 기록이다.
이번 유물 발굴은 조선 후기 사액서원들이 은해사, 거동사, 환성사, 인각사 등 지역의 대표 사찰들을 이른바 ‘속사(屬寺)’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편입해 노동력과 공물을 수탈했던 실상을 증명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 속사와 수호사찰, ‘보호’라는 기만 아래 행해진 합법적 착취
조선 후기 서원 제도의 비대화는 국가 재정의 파탄뿐만 아니라 불교계에도 유례없는 재앙을 가져왔다. 사액서원들은 주향(主享) 선현의 묘소를 관리하거나 서원의 유지·보수 비용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사찰들을 자신들의 하부 기구인 ‘속사(屬寺)’나 ‘수호사찰’로 지정했다.
말이 ‘수호’와 ‘보호’였을 뿐, 이는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억불숭유(抑佛崇儒) 체제 속에서 서원 유림들이 사찰을 합법적으로 노역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강압적인 억압 장치였다. 임고서원은 사액서원이라는 강력한 권력을 등에 업고, 영천과 인근 군위, 경산 일대의 큰 사찰들을 추려내 수탈 기지로 삼았다.
임고서원의 통제를 받던 대표적인 수호사찰은 다음과 같다.
• 경산 환성사(環城寺):서원 유생들의 압박으로 속사로 묶여 과도한 잡역과 물품 징발에 시달림.
• 영천 은해사(銀海寺):지역의 거찰임에도 서원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막대한 비용과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함.
• 영천 거동사(巨洞사):서원 제사에 필요한 제수(祭羞) 용품과 장작, 숯 등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노동력 착취를 당함.
• 군위 인각사(麟角寺):서원 사액 당시 토지(위전)를 대거 침탈당했으며, 사찰 터 자체를 서원 재사(齋舍)로 개축하려는 유림의 횡포에 직면함. 

▪ 조선1798년 ‘환성사 결송 소지 초본’이 밝힌 수탈의 구체적 실상
이번에 영천역사박물관이 찾아낸 고문서는 유림과 승려 간의 계급적 갈등과 착취 구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 후기 환성사 승려들은 본래 관아(하양현)에 종이(지 역, 紙役)를 만들어 바치는 국가적 의무를 지고 있었다. 닥나무를 베어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하는 종이 만들어 납품하는 승려들에게 수행을 위협할 만큼 고단한 일이었다. 이를 간파한 임고서원의 유생들은 환성사 승려들에게 “우리 서원의 속사로 들어오면 관아에 바치는 종이 역을 면제받도록 유림의 힘을 써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승려들은 결국 임고서원에 몸을 의탁(투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더 가혹한 시작이었다. 관아의 역을 면제받기는커녕, 임고서원은 환성사를  사유재산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 서원은 『포은집』의 일부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환성사의 전답이 본래 서원 소유의 학전(學田)이라 주장하며 공물을 요구했고, 유생들이 서원에 모일 때마다 필요한 식재료, 땔감, 종이, 붓 등의 물품을 환성사 승려들에게 무상으로 받아 갔다.
참다못한 환성사 승려들은 임고서원의 가혹한 착취를 피하고자 하양향교(河陽鄕校)의 속사로 자리를 옮기려 시도했으나, 이로 인해 임고서원과 하양향교, 그리고 사찰 간의 대규모 법적 분쟁인 ‘삼각 송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1798년 작성된 소지 초본은 승려들이 관청(경상감영)에 유림들의 기만행위와 무자비한 수탈 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갈등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cdi (cdi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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